몇 년 전 미국 정부가 연방 정부 기관 전반에서 카스퍼스키(Kaspersky) 제품의 사용을 금지했던 사건을 기억하는 독자도 많을 것이다. 당시 이 조치는 러시아 사이버보안 기업 카스퍼스키가 크렘린궁과 유착 관계에 있다는 의혹 때문에 내려진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미국 국토안보부(DHS) 관계자는 "이번 조치는 연방 정보 시스템에서 카스퍼스키 제품을 사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정보 보안 위험에 근거한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다.
그로부터 약 2년이 지나면서 세계의 관심은 사이버 위협에서 생물학적 위협 대응으로 옮겨갔지만, 최근 IT 매체 ZDNet과의 인터뷰에서 카스퍼스키 연구소의 창업자이자 회장인 유진 카스퍼스키(Eugene Kaspersky)는 드디어 자신들의 입장을 공개했다.
미국의 정치적 움직임일까?
DHS는 이번 제한 조치가 러시아의 첩보 활동 시도에 대한 대응이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여러 조사기관들은 이러한 주장에 이의를 제기해 왔다. 카스퍼스키 연구소 역시 과거 러시아 정보기관과의 어떠한 관련성도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상황을 바꾸는 데에는 실패했다.
유진 카스퍼스키에 따르면, 이번 사건은 연방 정부가 벌인 일종의 쇼였으며, 정부가 해당 소송에 지출한 비용이 그해 카스퍼스키의 미국 내 사업 규모보다 더 컸다고 한다.
그는 또한 첩보기관에는 훨씬 '저렴하고' 은밀하게 기밀 데이터를 감청하고 탈취할 수 있는 수단이 이미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자사가 DHS의 표적이 된 사례를 화웨이(Huawei) 제재 사례와 비교하며, 이번 조치는 미국의 정치적·지정학적 판단에 따른 움직임이라고 규정했다.
ZDNet 인터뷰에서 그는 이번 금지 조치가 오히려 미국 정부 자신의 국민 감시 행위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카스퍼스키의 보안 도구는 국가가 배후에 있는 사이버 위협을 탐지할 수 있고, 유사한 소스 코드를 사용하는 다른 악성코드와의 연관성까지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파격적인 주장이지만, 만약 입증된다면 시장에서 카스퍼스키의 평판에 대한 의혹을 상당 부분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금지 조치는 카스퍼스키의 시장에 영향을 미쳤을까?
세계 최대 시장 중 하나인 미국의 금지 조치는 카스퍼스키의 평판에 흠집을 남긴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유진 카스퍼스키는 미국 정부와의 거래가 회사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한 수준이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금지 조치 이후 다른 지역에서의 매출이 꾸준히 증가하면서 미국 시장에서의 손실을 충분히 만회했으며, 한때 관계를 끊었던 여러 파트너사들도 다시 돌아오고 있다. 이는 러시아 사이버보안 기업으로서의 카스퍼스키의 시장이 오히려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디지털 철의 장막이 원인일까?
러시아는 1980년대 고립주의 정책을 종료했지만, 세계 인터넷망과 단절되더라도 자체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국가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은 서구 사회의 경계심을 자아냈다. 이른바 '러시아 인터넷(RuNet)'으로 불리는 이 시스템은 서구권에서 소련 시절의 철의 장막(Iron Curtain)에 비유되곤 한다.
다만 카스퍼스키는 "내가 보기에 러시아는 데이터를 국내에 두길 원하고, 나머지 세계에 의존하지 않기를 원한다. 그래서 러시아가 하는 일은 시스템이 고립된 상태에서도 스스로 작동하는지 테스트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시스템이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라고 설명하며, 이를 순수한 국가 인프라 안전화 노력으로 해석했다.